연극의유혹

체홉과 톨스토이

체홉의 만년

작가로서의 체홉은 기성 작가로부터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악에 대한 무저항의 철학이나, 일하지 않는 다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또 간음의 비난과 같은 톨스토이의 도덕에 상당히 기울어진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죄수들이 저항하는 않고 매를 맞으며, 빈곤과 음탕과 병이 음산하게 소용돌이치는 사할린 섬을 다녀온 뒤로는, 그러한 톨스토이적인 사상이 결국은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무시한 헛된 공론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체홉은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 여행 이후 인간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체홉은 사할린의 버려진 자들을 보면서 허구의 소설로 <사할린 섬>을 쓸 수 없었고, 현장 보고서로 현실의 삶을 고발했다.

체홉은 권력에 의한 우연성이 인간의 삶을 굴복시키는 상황을 주목했다. 체홉은 작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체홉은 사할린 여행 이후 작가가 민중의 삶에 기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현실의 삶은 체홉에게 무거웠다. 체홉은 현실에 기초하지 않는 꿈꾸는 삶이란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체홉의 4막 희곡은 그의 중기에 씌여진, 4막 희곡<이바노프>(1887), <바냐 아저씨>의 원안인 <숲의 주인>(1889)을 거쳐, <갈매기>(1895)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놀랄 만한 변화를 보인다. 이 극작상의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면에는 이미 보았듯이 작가의 인생관과 예술적인 변모가 있었다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체홉의 희곡은 흔히 분위기의 극, 혹은 정극이라고 한다. 이렇다 할 뚜렷한 줄거리나 사건도 없이 작중 인물의 일상 생활과 대화, 인간이 가진 서로 다른 개성들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여러 관계들이, 한편의 인생의 시를 보는 듯 무대의 분위기를 차차 고조시키다. 그러한 요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대사 사이의 무언, 효과 음악의 활용, 서정적이고 간결한 대사, 연구되고 계산된 대화의 묘, 나아가 다면적인 무대의 사용 등 온갖 극작상의 기교가 구사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체홉의 잔잔하고 암울한 희곡이 갖는 이상한 박력, 긴박감일 것이다.

오페라 리옹, 오페라 개의 심장

체홉의 만년은 폐결핵과 고독으로 인해 쓸쓸하고 괴로운 생활이었다. 그 나날에 위안을 주고,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품었던 희곡의 꿈을 실현시켜 준 것은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통솔하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이었다. 체홉이 죽기 3년 전인, 마흔한 살 때 결혼한 아내도 이 예술 극장의 배우인 올리가 크니페르이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과 체홉의 상봉은 1898년 가을, 예술극장에서 <갈매기> 를 재연하여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 비롯된다. 사할린 섬 방문 이후 6년 만에 현실의 삶과 꿈꾸는 삶의 이중성을 갈매기에 투영했다. 체홉은 <갈매기>의 첫 장에 자신의 작품을 ‘코메디’라고 썼다. 그 이유는 현실에서 꿈꾸는 삶만 추구하는 인간 허구성의 한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체홉은 인간이 누구나 꿈꾸는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의 삶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체홉은 현실을 묵묵히 견딜 수 있는 요소로 사랑과 추억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체홉의 깊은 고민이 있다. 그런데 인간 본질을 현실과 꿈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체홉에게 꿈틀거렸다. 그 변화는 현실과 불멸에 대한 체홉의 깊은 고민 때문이었다.

<갈매기>가 1896년 가을, 페테르스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 초연의 실패는 명배우가 중심이었던 그 당시 연극계의 풍조나. 체홉극의 진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연출가, 배우, 나아가서는 작가에게 호의를 갖지 못했던 관객들의 책임이라 생각되는데, 체홉은 실소의 소용돌이로 화한 극장을 빠져나가, 가을밤의 페테르스부르크를 홀로 쓸쓸히 헤매며 두 번 다시 희곡은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이러한 체홉에게 다시 극작을 하게끔 만든 것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의한 재연 무대였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은 명배우 중심이었던 당시의 연극계 풍조를 거부하고 작품의 철저한 이해와, 배우가 맡은 바 배역에 충실히 하는 새로운 연출, 새로운 연기를 신조로 삼아, 조화와 분위기가 요구되는 체홉의 극의 진가를 무대에서 표현해 보였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휘장에 그려진 날아가는 갈매기 마크는 이 여사적인 <갈매기> 재연의 성공을 기념한다. 또 <세 자매>, <벚꽃 동산>의 두 작품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을 위해 씌여졌다. <벚꽃 동산>

<벚꽃 동산>은 체홉 자신이 쓴 두 편의 소설로 짜여져 있다. 첫 번째 소설은 1898년, 즉 이 희곡보다 5년 먼저 쓴 <친구네 집에서>이다. 이것은 선조 대대로 내려온 아름다운 영토가 저당 잡혀 머지 않아 경매에 넘어 가려는데도 옛날의 감미롭던 생활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지주 가족의 이야기로, <벚꽃 동산>의 라네프스카야 부인과 가예프의 세계는 이 소설에서 취해 온 것이다.
두 번째 소설은 <벚꽃 동산>과 전후해서 착상된 <약혼녀>이다. 이것은 결혼을 앞둔 여주인공이 낡고 진부한 생활에 의혹을 느끼고 새로운 생활을 찾아 공부하러 가는 이야기로, <벚꽃 동산>의 아냐와 트로피모프의 세계는 이 소설과 무척 많이 닮았다.
체홉의 만년은 고리키, 부닌, 쿠프린 등 젊은 작가들과의 교제를 통해 삶의 위안을 받는 시기였다. 그는 추운 모스크바를 떠나 ‘따뜻한 시베리아’라 일컫던 얄타의 흰 벽 집에 살기도 하고, 때로는 남 프랑스의 니스로 가서 지내면서 병마와 싸웠으며, 젊은 작가들을 항상 소중히 했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체홉의 건강은 점차 쇠약해졌다. 여배우이기 때문에 1년의 대부분을 떨어져 지내는 아내에게 근 450통 가까운 편지를 써 보냈는데, 아내에게 보낸 그 편지 속에는 “기침이 나 몸이 죄어드는 것 같다.”, “굉장히 심한 기침을 해서 온몸이 아프다.”는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1903년 말에 모스크바에 나가 <벚꽃동산> 연습에 입회했을 때에는 털외투를 걸치는 것조차 무거워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04년 1월 17일 <벚꽃 동산> 공연의 첫날이였고, 체홉의 마흔네 번째 생일이기도 했으며, 그의 필력 25년의 축하 행사가 겸해져 있었다. 제3막이 끝났을 때, 야위고 쇠잔한 체홉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무대 앞에 서서 많은 축사와 선물을 받았다. 그 사이 그는 쉴새없이 기침을 해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관객들은 그에게 앉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계속 서 있었다. 이것이 체홉의 영광스러운 마지막 모습이었다. 축전은 성대했으나 무겁고 괴로운 인상을 남겼다. 스타니슬라브스키는 그때의 상황을 “장례식 냄새가 났다.”고 기술했다.
그해 7월 2일, 체홉은 남 독일의 휴양지 바덴바덴에서 숨을 거두었다. 임종의 자리에는 여배우 아내 크니페르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체홉은 독일어로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글/ 극작가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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