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는 ‘VSArt(Volontariat et Soutien par l’Art, 예술을 통한 자원 봉사와 후 원)’라는 협회가 있는데, 이 협회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병원과 양로원의 연주회 를 기획한다. 연주회 시간은 대개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이며, 한 시간 프로그램 을 연주하게 된다. 파리에는 ‘병원과 문화(Hôpital et Culture)’라는 이름의 또 다 른 협회가 있는데, 이 협회 역시 파리 시내 병원들의 연주회를 기획한다. 파리에 오자 마자 우연한 기회로 이 두 협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최근 VSArt 협회에서 알츠하이머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 협회와 프랑스 알츠하이머 협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이 강의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과 인상 깊은 것 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선 아직도 알츠하이머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알츠하이머는 존재했지만,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을 자연의 현상이라고까지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이 유일하게 새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 한다. 그들은 연습을 위해 모이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모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자신들이 모이는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몰 랐던 사실도 잊고, 노래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 프로페셔널 오르가니스트는 자신이 연주하는 곡들을 모두 암보로 연주했는데, 알츠하이머에 시달리면서 더 이상 아무 곡도 연주할 수 없게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는 아직 걸을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은 걷는 것 조차 잊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5살에 파리에 정착한 세르비아 출신의 한 여성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프랑스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세르비아어로 말하기 시작해 서, 그녀의 남편은 부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통역을 고용해야만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강의와 프랑스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의 증언들은 나에게 음악과 기억에 관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기억은 크게 무의식과 의 식으로 나뉜다. 우리의 무의식은 7살 혹은 그 이전에 대부분 형성된다. 우리의 인성,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등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결정된다. 그리고 의식 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렸을 적에 형성된 무의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우 리는 무의식의 삶을 죽을 때까지 이어갈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이 무의식을 통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노력과 새로운 습관을 통해서 삶을 바꿀 수 있지만, 이는 정말로 드문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무의식은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기억의 뿌리이고 근원이다. 어렸을 적에 먹곤 했던 음식에 대한 기억,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순 간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은 이런 순간에 대한 회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억의 뿌리를 확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역사는 작은 역사책이기도 하 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나이를 먹으면서, 이러한 회상은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무의식의 영역은 의식보다는 감정과 더 깊은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프랑스 알츠하이머 협회의 사람들은 알츠하이머를 예방하거나 늦추는 방법을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

균형 잡힌 식단, 쾌적한 생활환경, 지속적인 사회활동 등 이다. 사실 이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들이다. 다만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교제를 하는 사람들일 수록 알츠하이머에 노출될 확률이 낮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나이가 먹을 수록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과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긴장과 관용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는 매우 좋은 자극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날에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무수한 정보들을 거의 초단위로 접하면서 살고 있다. 손에 쥐고 살다시피 하는 핸드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삶의 풍경이다. 문제는 일상에서, 삶에서 무엇인가를 회상하고, 또 때로는 간절하게 그리워할 시간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간단하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노래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단지 우리가 배우고 익힌, 그러니까 기억한 것을 단순히 재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음악은 어쩌면 매우 간절한 그리움의 상태를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리움의 상태가 가장 깊고 강렬한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음악을 잉태하게 하는 영감이 되어 왔다.

피아노건반

20세기의 독특한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는 ‘기억상실자의 회고록’이라는 글을썼다.

물론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지 않았고, 기억력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는 글을 통해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동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다만 그는 ‘기억상실자의 회고록’을 쓰기 위해서,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느꼈 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많이 걸었다. 그는 인생 말년에 파리 북쪽의 몽마르트 와 자신이 거주하던 파리 남쪽 근교의 아르퀘이까지 매일 같이 걸어다녔다. 몽마 르트의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수입이 충분치 않 아, 매일 같이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오늘날 메트로를 이용한다고 해도, 왕복 2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인데, 사티는 매일 같이 6시간 이상을 걸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덕분에 그는 ‘기억상실자의 회고록’을 쓸 수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라졌던 에펠탑 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 다...